검색

2025.02.12 Udienza Generale 2025.02.12 Udienza Generale   (Vatican Media)

“어디서 길을 잃든, 하느님은 항상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25년 4월 16일 수요 일반알현 교리 교육에서 아버지와 두 아들의 비유를 풀이하며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어디에 있을까?” 하고 자문해 보라고 초대했다. 교황은 두 형제가 서로 다른 이유로 길을 잃었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문을 활짝 열어뒀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사랑은 “다른 이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무언가를 양보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2025년 희년 교리 교육] 우리의 희망이신 예수 그리스도
제2부 예수님의 생애: 비유들


5. 자비로운 아버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루카 15,32 참조).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복음서에 등장하는 몇몇 인물들과 예수님의 만남에 관한 묵상을 마치고, 이번 교리 교육부터는 몇 가지 비유를 살펴보려 합니다. 비유는 우리가 알다시피 일상생활의 모습과 상황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도 깊이 닿아 있지요. 비유는 우리에게 묵상거리를 주고,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나는 어디에 있을까?’

아마 우리 모두가 어릴 적부터 기억하는 가장 유명한 비유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바로 아버지와 두 아들의 비유입니다(루카 15,1-3.11-32). 이 비유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 복음의 핵심, 곧 하느님의 자비를 만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들려주셨다고 전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신다고 투덜거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스스로는 길을 잃었으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다른 이들을 판단하는 사람들을 향한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우리가 어디서 길을 잃었든, 어떻게 길을 잃었든, 하느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풀을 뜯으려다 길에서 벗어나거나 피곤함에 뒤처진 양처럼 길을 잃었을 수도 있고(루카 15,4-7 참조), 땅에 떨어져 보이지 않게 된 동전처럼, 또는 누군가가 어딘가에 두고 그 자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동전처럼 길을 잃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이 아버지의 두 아들처럼 길을 잃었을 수도 있지요. 작은아들은 너무 요구가 많다고 느낀 관계에 지쳐 떠났지만 길을 잃었고, 큰아들 역시 길을 잃었습니다. 몸은 집에 있어도 마음에 쌓인 교만과 원망이 참된 관계를 가로막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책임이 따릅니다. 다른 이를 향해 나아가려면 항상 무언가를 양보해야 합니다. 그런데 비유 속 작은아들은 자기 자신만 생각합니다. 마치 어린 시절이나 청소년기의 특정 시기처럼 말이지요.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이기적이어서 인간 관계를 이어가지 못하는 어른들도 많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찾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더 깊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나만을 위해 살 때가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해 살아갈 때 비로소 참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작은아들은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사랑에 목말라 있으며, 사랑받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나 사랑은 귀한 선물이기에 소중히 다루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 사랑을 허비하고, 자신의 가치를 헐값에 내던지며, 스스로를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기근이 들어 아무도 자신을 돌보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그는 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빠지기 쉬운 위험은 사랑을 구걸하기 시작하고 눈앞에 나타난 첫 주인에게 매달리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들이 우리 마음속에 왜곡된 생각을 심어줍니다. 마치 죄를 속죄해야만 하는 것처럼, 또는 참된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지요. 결국 우리는 오직 종의 자리에서만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실제로 작은아들이 밑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그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 사랑의 부스러기라도 구걸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직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만이 우리를 이런 왜곡된 사랑 개념에서 해방시켜 줄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우리는 바로 이런 체험을 하게 됩니다. 위대한 화가 렘브란트는 유명한 그림에서 작은아들의 귀환을 놀랍게 표현했습니다. 이 그림에서 특히 두 가지 세부 사항이 제 마음에 깊이 와닿습니다. 첫 번째로는, 작은아들의 머리가 참회자의 머리처럼 깎여 있는데, 동시에 어린아이의 머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는 작은아들이 새롭게 태어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두 번째로는, 아버지의 두 손이 서로 다르게 그려져 있다는 점입니다. 한쪽 손은 남성의 손, 다른 쪽 손은 여성의 손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는 용서의 포옹 속에 담긴 아버지의 강함과 어머니의 자애로움을 함께 드러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실제로 말씀하고자 하시는 대상을 가장 잘 대표하는 인물은 바로 큰아들입니다. 그는 늘 아버지와 함께 집에 머물렀으면서도 마음만은 아버지와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 아들도 아마 떠나고 싶었을 테지만, 두려움이나 의무감 때문에 그 관계 안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서 억지로 지내다 보면 내면에 분노가 쌓이기 시작하고, 언젠가 이 분노는 터져 나오게 마련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결국 집 밖에 남겨질 위험에 처한 것은 바로 큰아들입니다. 아버지의 기쁨을 함께 나누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에게도 먼저 다가갑니다. 그를 꾸짖거나 큰아들의 본분을 강요하지 않고, 그저 큰아들이 자신의 사랑을 느끼기를 바랄 뿐입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집으로 들어오라고 초대하며 문을 활짝 열어둡니다. 그 문은 우리에게도 활짝 열려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고, 멀리서도 우리를 알아보시며, 언제나 문을 활짝 열어두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 아름다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그리고 우리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다시 찾을 수 있는 은총을 하느님 아버지께 청합시다.

번역 김호열 신부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용시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고, 임의 편집/변형하지 마십시오)

 

17 4월 2025, 12:27

일반알현 최신기사

모두 읽기 >